가는 길과
양마단지 마을 이야기

-   가족이 첫 번째 살았던 집 -

 

 양마단지는 가족이 육지에서 처음 제주로 이사한 다음날인 1990년 9월 6일부터 1998년3월6일까지 살았던 제2의 고향처럼 정들었던 곳입니다.

 제주 입도 첫날 밤을 서귀포에서 지새고 양마단지의 과수원에 텐트를 제외한 야영장비와 서귀포시에서 구입한 쌀과 도배지등을 사들고 입주하였습니다.

 먼저 살던 과천시에서 부친 몇가지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비료창고를 개조하여 방과 부엌을 만들고 전기배선, 상ㆍ하수도, 진입도로를 개ㆍ보수하여 7년6개월을 살았던 곳이지요.

 감귤원 4000평의 한 가운데 있는 곳으로 가족은 이곳 감귤원을 임차하여 3개년을 경작하였는데 96년 부터는 감귤연구소 부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토종닭을 키우던 이야기입니다.

 

 

주소
697-370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하례리 1329
 
제주시에서
제주시외버스 터미날 - (5ㆍ16횡단 서귀포행 40분 소요) - 하례리(혹은 감귤단지, 양마단지 라고도 함) 정류장 하차 - 도보 10분 소요
 
서귀포시에서
1호광장 동쪽, 초원다실 건너편, 동문로터리 남쪽 시내버스정류장 - (양마단지행 3번 시내버스 20분 소요) - 종점하차 - 도보 10분 소요
 
거주기간
1990년9월부터 1998년3월까지 7년반

 


양마단지 마을 이야기

鶴林誌<南元邑 下禮二里> 중에서 " 양 마 단 지 "

편집인 : 현승부
(98년도 '위미농협협동조합 조합장'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기고자 : 현권수

위 학림지에는 "양마단지" 외에도 150페이지의 금싸라기 같은 양마단지 마을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발행인들과 협의하여 모두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마을에서 북쪽으로 바라다보면 동쪽으로 노곤수 동산과 서쪽으로 두수오름이라는 작으마한 봉우리가 있다. 우리 고장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새와 촐이 생산되는 중요한 들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넓은 들판을 새와 목초 재대로 이용되는 데는 너무나 아까운 땅들이다.

 이 시대(1960년)에는 아직도 우리 농촌의 실정은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 상태였다.

 더군다나 중산촌지대에 거주하는 농민생활은 높은 지대와 척박한 토지때문에 농작물이 잘 안되여서 살기가 매우 어려웠던 한 때이다.

 이러한 생활을 다년간 하면서 살아 오던중 정부에서는 농공병진 정책의 일환으로 잘못 사는 농촌을 개발 목적으로 우리 제주도에도 우리 고장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새와 촐이 생산되는 중요한 들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넓은 들판을 새와 목초 재대로 이용되는 데는 너무나 아까운 땅들이다.

 이 시대(1960년)에는 아직도 우리 농촌의 실정은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 상태였다.

 더군다나 중산촌지대에 거주하는 농민생활은 높은 지대와 척박한 토지때문에 농작물이 잘 안되여서 살기가 매우 어려웠던 한 때이다.

 이러한 생활을 다년간 하면서 살아 오던중 정부에서는 농공병진 정책의 일환으로 잘못 사는 농촌을 개발 목적으로 우리 제주도에도 단지 조성을 하기에 이른다.

 1967년도에 애월면 광령리에 양잠단지, 표선면 성읍리에 축산단지, 남원읍 하례2리에 양마단지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단지 지역을 선정하는데는 지형 답사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우리 마을 단지 후보 지형은 광활하기는 하지만 분묘지가 여기저기 많아서 개발하는데는 장애물이 되여 단지 조성하기에 무척이나 애로가 있었다.

 그러나 제1횡단도로가 인접되고 개척할만한 지역이라 복받은 지대인지 모르지만 지사(정우석)님을 비롯한 관계당국 직원들의 몇 차례 현장 답사하여서 양마단지 조성지로 선정되었다.

 현재 조사시에 두수오름 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면 동쪽은 노곤수동산, 서는 두수오름, 북쪽은 목장 아랫캣담, 남쪽은 중잣 아랫캣담 사이인데 옛날에 물려우던 중잣일대이며, 동남쪽으로 조금 벗어난 하잣 지경, 일부를 포함하여 대략 200여 ha가 훨씬 넘는 광활한 지대에 구역 한계선을 정하여 양마단지 조성사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전도에 걸쳐 양마단지 입주자 33세대권 모집한다.

 양마단지 희망 입주자중 선정된 33입주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남원면 하례리
현천수, 장성순, 오봉상, 양기원, 고익중, 현태순, 현승종, 김영하, 허오, 허창우, 현청일.
 
남원면 신례리
정치종, 김천교.
 
남원면 위미리
양태옥.
 
서귀읍 신.하효리
오남수, 오대기, 오남용, 오창균, 허민, 고방옥, 오승의, 강달삼, 현학남.
 
서귀읍 신.상효리
현세준, 김순섭, 오영우, 고관식, 고명관, 이문일.
 
중문면 상예리
장도훈.
 
대정읍 무릉리
임기호
 
제주시
이선진, 강익주

 입주자는 심사숙고하여 선정되었다.

 이제 부터는 관계당국의 단지조성계획과 설계에 의하여 일을 하게 된다.

 당시 융자금은 일세대당 58만을 받고 주택 18평, 축사 1동, 토지3정보, 공동광장 1ha 등 합계 토지구입은 100정보를 확보해야만 했다.

 주택을 짖고 토지구입 하는데는 자체부담이 있었지만 너무나 부족하여 걱정도 많았다.
 당시 도로 상태는 남북으로만 비좁고 구부러진 옛날 길들이 5갈래가 있었을 뿐 동서로 뚫은 길은 한군데도 없었다.

 당국에서 신도로개설 청사진이 나왔다.

 현재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 팔방으로 또는 외곽 지대로는 원형도로 설계가 나왔고 광장중심으로는 주택지로 지정되었다.

 그해 1967년도 5월달에 단지 중심지에서 가공식을 하고 각 입주자들은 토지를 구입하는 등 단지조성 사업에 한창 바빴다.

 도로개설은 중기를 지원받아 설계대로 도로수용토지를 지주의 승낙을 받은것도 있고 일부는 못 받은 땅도 있었지만 도로개설 하는데는 애로가 많았어도 무난히 설계대로 개설해 놓았다.

 그 당시 단지 구역내 땅 값은 평당 최하로는 20원 선부터 최고 70원 선까지 매매가 이루어 졌었다.

 입주자들은 한여름 불볕 더위에도 아랑곳 없이 황무지를 개척하는데는 구슬땀을 흘리며 참으로 애를 썼던 것이다.

 개간 방법은 삽과 괭이로 또는 저리왓가는 소를 빌어서도 개척했으며 경운기로도 했으나 능률이 저조했고 해서 트럭타를 빌어서 1~2년간에 걸쳐서 대부분 완공해 놓았다.

 이 때만 해도 제주도에는 경운기가 얼마 없을 적인데 단지에 한해서 6세대에 1대씩 경운기가 배정되여 양마단지내에도 경운기 5대가 융자로써 지원받은바 있다.

 개간비는 양곡으로 일부 보조를 받은바도 있었다.

 단지 입주 계획에 따라서 1967년도에 10세대 입주를 선정하여 5월달경에 주택을 착공해서 그해 12월 말일에 완공하여 남제주군 권동수 군수님이 참석하에 입주식을 한 바 있다.

 그러하는 가운데 동분서주했던 한 해가 덧없이 저물고 1968년 새해가 밝았다.

 나머지 23세대가 설계대로 집을 짓기 시작하고 미쳐 개척못한 땅을 개간하고 개간한 땅에는 호구지책을 하기 위하여 전해에 유채와 보리들을 파종 했으나 땅이 척박하고 개간지라 농사가 잘 될리가 만무했다.

 여기서 양마를 소개해 본다.

 양마란 일종의 삼종류인데 외국에서 들어온 개량 품종이다.

 그래서 양마라 부르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양마종자를 단지 지역에 파종해서 시험 재배를 해 보았는데 잘 자라서 성공을 했었다.

 그 당시로는 대단히 고소득작물로 알려졌다.

 양마원료는 설탕마대, 생고구마 마대등 다방면으로 널리 사용한 제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서 화학섬유가 등장하여 고구마 그물마대가 나왔고 쌀마대가 나와서 양마제품은 뒤로 밀려 나게된다.

 이러한 때문에 당국에서는 이렇다는 말도 없이 양마재배는 끝나고 말았다.

 입주자들은 실망했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단지 명칭이 바뀐다.

 공업원료 작물단지로 개칭된 것이다.

 공업원료란 고구마인데 척박한 땅에 고구마조차 잘 될리가 없다.

 다행히도 단지구역 하천변에(속칭 모래기도) 사시사철 샘물이 솟아나서 융자금을 받아 전분공장을 지어 가동했으나 역시 운영난과 여러가지 사정으로 성공치 못했다.

 그 시절 1960년 대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는 우리고장에서는 감귤 재배붐이 일어나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감귤원조성이 한창 때였다.

 이때 성목된 감귤나무를 보고 대학나무라 부를 정도로 가장 소득 높은 작물이 시작될 즈음 공업원료단지명칭은 사라지고 이름도 향기로운 감귤단지로 다시 명칭이 바뀌어 진다.

 때는 흘러서 오늘날 단지 전 지역에 감귤나무가 식제하여 과수원이 조성되여 올해도 풍요로운 수확을 보게 되지만 과연 입주자 과수원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그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융자금 상환 문제다.

 융자금은 4년거치 5년상환 중기자금이었다.

 개간 지대에 농사를 지어서는 도저히 생활하고 이자도 매년 상환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융자금을 받을 적에는 당국에 근저당되었다.

 이자를 못 물어 연체이자가 나고 상환기간은 끝나가는데도 갚을 능력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소중히 가꾸어 놓은 땅을 팔아야만 했다.

 땅 값은 구입당시보다는 두배정도는 뛰었다 해도 이자 또는 연체이자와 원금을 상환할라니 본의아니지만 소중한 땅을 팔아야 했다.

 그토록 피땀흘려 일궈놓은 땅을 팔기에는 애석하기만 했다.

 그래서 입주자 일부는 나머지 재산을 처분하여 빚을 청산하고 본 고향으로 되돌아 가기도 하였다.

 이 글을 써보는 본인도 입주자의 한사람으로서 단지 문제를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본다.

 첫번째는 단지조성 당시 명칭의 감귤단지로 되어서 감귤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조성했다면 중농은 되였을 것이다.

 두번째로는 장기융자를 주었더라면 땅값이라도 상승하여 일부만 처분해도 융자금 상환하고도 남음이 많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지나갔던 일들을 생각할 따름이다.

 단지 명칭은 세번씩이나 바뀌어졌고 애쓰게 가꾸어 놓은 땅들은 처분해서 융자금을 상환하고 나서 남은 재산이라곤 얼마 안되고 보니 행정 당국에 원망도 해 본다.

 하지만 그 가옥과 땅들은 주인의 일부 바뀌어도 남은 입주자들은 오늘도 열심히 과수원에서 일을 하며 잘 살고 있다.

 그 땅들은 일부 토지가 자본가 손에 넘어가 과수원과 기타 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반면 이 감귤단지 지역내에 1993년도 감귤 연구소가 들어와서 감귤 연구에 전념하는 것을 볼때 이 고장의 자랑이라 생각해 본다.

 교통이 편리하고 산수가 아름다워 살기좋은 양마단지 동네가 이루어져 있다.

 인심좋고 살기좋은 곳이라 자연 입주자가 많아서 오늘날 100여 세대에 400여명 인구가 부지런히 일하며 화목하게 살아 나가는 것을 볼때 마음이 흐뭇하다.

 이렇게 지내온 30여년 과정은 비록 험난하지만 오늘날 양마단지라 하면 제주도 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이동네 주민 역시 활기찬 삶을 이어 갈적에 앞날이 빛나게 기대되는 지역으로써 성정할때 자랑스럽기만 하다. <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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