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제주로 이사한 날이 90년 9월 5일입니다. 이제 만 6년하고 4일째가 되는군요.
그날 9월 5일은 서귀포시에서 하루 자고 그 이튿날 현재의 거주지로 입주하였지요.
과천에서 제주로 이사 결정을 처음 했을때는 임시로 제주시에 근거를 마련할까 했었습니다.
그러다 현 주거지가 4천평의 귤밭안에 있는 빈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또 당시 병작중이던 귤밭을 계약기간 이후에는 우리에게 장기 임대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있었으니 제주시에서 살면서 그런곳을 찾느라 소요될 몇년을 앞당기는 큰 쾌거 였습니다.
몇가지 되지않는 이삿짐을 자동화물로 부쳤지만 도착은 며칠 후가 될것이었습니다.
이삿짐이 도착할때까지 꼭 필요한 간단한 야영장비만을 등에 메고 지금의
집에 도착한 직후에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마져 없었습니다. 귤 수확철에나 사용하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연탄불을 피우고, 도배를 하고, 주변의 산같은 건축폐자재와 쓰레기를 치우고 하수도를 만드는데 며칠이 걸렸습니다.
처음 해보는 삽질에 손바닥도 아물날이 없었지요.
그동안은 야영장비로 숙식을 해결하였는데 그 사이에 이삿짐이 도착하여 정리를 하고나니 오늘의
모습이 반정도는 완성되었습니다.
어느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차츰 주변을 둘러보니 주거지 반경 100m 이내에 묘가 5개였습니다.
4천평 귤밭안에 모두 13개가 있었습니다.
취락지역에서 200m 정도, 해발 170m, 동남향 5도 이내의 경사인 15~20년생의 한라산 정상이 보이는 감귤밭이었습니다.
감귤 주산지의 동서방의 중앙이며 남북방의 북단입니다.
감귤밭을 일구기 전에는 묘나 만들던 동내의 뒷동산이었던 모양입니다.
해만지면 바다의 고깃배외에는 불빛을 구경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소나기가 내릴때면 비누칠을 하고 뛰어 다녀도 될것 같고 밤이면 반딧불만이 찾아오는 한적한 곳입니다.
집 정리가 대강 끝나가던 어느날 부터 갑자기 주위에 사람들이 떼지어 나타났습니다.
추석이 가까웠던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제주지역 벌초는 타지역과 달리 음력 8월1일을 전후하여 이루어 집니다.
학생들에게는 벌초방학이란 것도 있는데 보통 음력 8월1일이었습니다.
고등학생 이상연령의 남자들이 많았는데 적게는 한가족 5~6명에서부터 보통은 20명이 훨씬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요즘 신문에 많이 보이는 벌초 대행 인부들인줄 알았습니다.
한곳만이 아니라 주위의 몇곳을 벌초하는데다 음식을 차리거나 절을 하는 것 같지 않았으며 몇군데 벌초를 마치고는 곧바로 다른 묘를 찾아가는 형색이었기 때문이지요.
문중의 일가들이 모두 모여 일가의 모든 묘를 찾아 다니며 벌초를 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가세 시위의 효과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가족은 괜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이사 첫해에 우리는 추석 귀성 성묘를 포기 했었습니다.
새로운 생활터전에서 조금 경건한 마음으로 첫 명절을 맞이할줄로 알았는데 우리 밭의 묘를 벌초하는 양으로 보면 문중별로 5가문은 넘어 보이는데 추석날이 되면 100여명 이상의 성묘 인파가 몰릴 것이고 그 차량행렬은 기백미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좁은길 사이를 비집고 시내에 출입차 드나들때의 혼란이며 공원묘지의 관리인처럼 수 많은 인파를 지켜보고 있을 형색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추석하루를 제주 관광이나 할까도 생각했지만 제주 성묘의 모습을 구경할 기회라 생각되어 단념하고 기다렸습니다.
추석이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내가 성묘가는 심정으로 성묘객들을 기다렸지요.
그러나 왠걸, 하루해가 다 가도록 사람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달력을 다시 보고 육지의 친척들에게 추석인사를 한 것으로 보아 그날이 추석은 틀림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추석 당일은 집에서 가족모임만으로 명절을 보낸다는 사실도 그 후에 알았습니다.
이제는 익숙해 졌지만 한동안 추석이면 타향임을 절실히 느끼고는 했지요.
즐거운 추석명절을 맞으시고 가내 평온하시길 기원합니다.
96년 9월 9일
제민일보 97/08/28 [벌초] 제주서만 볼 수 있는 세시 풍속
──────────────────────────────────────
음력 팔월을 며칠 앞둔 제주의 들녘에서는 조상숭배사상이 이곳 저곳에서 목격되는 등 아름다운 풍경이 연출된다.
백로·추분 절기가 있는 음력 팔월을 며칠 앞두고 30도를 오르내리는 늦더위가 이어져도 산과 들, 밭 등 선묘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소분’으로 불리는 벌초가 일제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벌초는 우리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조상숭배사상에서 출발한 묘지관리방식이다.
다시말해 조상 모시기를 으뜸으로 하는 이 지역의 풍속은 무덤·산담등 전통매장풍습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가꾸는 벌초로 까지 이어진다.
명당자리에 묘를 쓰는 것이 조상을 모시는 것이고, 산담이 조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벌초는 조상이 남에게 흉이 되지 않도록 오래도록 가꾸고 그 음덕을 기리는 아름다운 세시풍속이다.
그래서 제주인들은 자신이 저승이라는 새로운 세계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도 후손들에게 조상에 대한 벌초를 잊지 말도록 신신당부한다.
타지역이 청명·한식·추석 절기에 성묘를 하는 것과 달리 제주의 벌초는 보통 팔월 초하루부터 시작, 보름이내에 끝마치는 것이 상례이다.
팔월 절기에 벌초를 행하는 것은 풀이 잘 자라고 그렇지 않은 시기를 선택하는 오랜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제주인의 뛰어난 생활과학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보통 팔월 절기라 하면‘백로’를 일컫는데 실제로 이 시기가 되면 찬바람이 불어 풀의 성장속도가 더디게 된다.
강창언씨(제주대박물관)는 “이 시기에 베어낸 풀은 이후 아무리 성장해도 씨앗을 맺지 못한다”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활의 지혜가 벌초 속에 스며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음력 팔월이 다가오면 육지·해외의 모든 제주인들은 만사를 뒤로 하고 문중 전체가 참여하는 이른바‘모듬벌초’에 참여키 위해 귀성채비를 한다.
그리고 모듬벌초에 참여한 이들은 조상묘소에 엎드려 풀 한포기를 벨 때마다 살아 생전의 불효를 뉘우치고 사죄하면서 그 은공을 추앙한다.
잊혀져가는 조상의 삶의 숨결을 마음속에 느끼며 제주인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는 등 제주인의 뿌리를 다시금 되새긴다.
보통 팔월 초하루 시작했던 벌초풍속도 시대가 변하면서 어느새 현실적으로 타당성있게 변화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시대가 이동, 생업 등을 이유로 가족·친지가 흩어지면서 이제는 팔월 초하루를 그렇게 고집하지 않는다.
또 경건한 마음으로 선묘를 대하기 위해 제주인들은 과거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범날과 뱀날 등 궂은 날을 피했지만 요즘은 공휴일 등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팔월 초하루를 전후해 벌초를 시작한다.
하지만 제주인들은 반드시 팔월 명절 전에는 태풍이 몰아치든, 폭우가 쏟아지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벌초를 끝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진성기관장(제주민속박물관)은 “‘추석전이 벌초 안허민 너울썽 온다’는 속담처럼 팔월 명절전에 벌초를 하지 않으면 조상이 잡초를 둘러쓴채 명일 보러 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벌초시기가 지나면 제주에는 고총(古塚) 즉,‘골총’이라 불리는 벌초를하지 않은 무덤을 찾아볼 수 없게된다.
만약 골총이 발견되면 제주인들은 그 후손이 끊겼다고 단정하듯이 말한다.
특히 자손이 살아 있어도 이 시기에 벌초를 하지 않을 경우 그 직업이 의사든, 박사든, 정치인이든 상관없이 불효자로 낙인 찍혀버리는게 제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색이요, 현실이다.
조상숭배사상이 어느 지역보다 뚜렷해 벌초방학을 하거나 도내 자치단체가 무연고 분묘를 벌초하던 제주지역의 미풍양속도 이제는 점점 퇴색하는 것일까.
몇년전부터 생겨난 벌초대행업체가 성행하고 모듬벌초에 참여하기 보다는 돈을 보내 그것으로 인부를 부리는 현상이점점 두두러지고 있다.
그러나 벌초에 어린 아이들을 동행하는 부모들의 모습에서 조상숭배를 으뜸으로하는 제주의 풍속은 다소 퇴색되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 믿어본다.<朴訓奭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