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성
6시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임재원
1일  ·

백창욱
9월 18일 오전 10:20  ·

박도 실록소설 『허형식장군』.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고백하자면 이런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의 항일 독립운동사 지식은 얼마나 단편적인지 새삼 절감한다.

동북항일연군하면 우선 떠오르는 인물이 김일성이다. 허형식장군은 김일성과 같은 급의 독립군 지휘관이다.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장이고 허형식이 3로군 군장이다. 소련 극동군이 재편성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조직도에는 대위 계급의 영장이다. 모두 네 개의 영이 있는데 제2영장과 제4영장은 중국인, 제1영장, 제3영장이 김일성, 허형식이다. 즉 일제와 그 괴뢰인 만주군과 맞선, 조선을 대표하는 항일무장독립투사 지휘관인 것이다.

허형식의 이름이 빛나는 것은 일제의 극악한 토벌에 맞서서 소련 영내로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그의 전구를 사수한 것이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이듬해 괴뢰만주국을 수립하였다.(1932년) 그와 동시에 중국 동북(만주) 인민들의 항일반만운동도 들불처럼 일어났다. 일제는 이를 진압하고자 일명 ‘만주국 치안 숙정계획’을 세워서 항일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했다. 마치 조선 참빗으로 이를 잡듯이, 샅샅이 남김없이 싹싹 빗질하듯 삼광작전으로 극악하게 토벌했다.(삼광작전은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악랄한 잔학행위다) 치안숙정작전이 극에 달하자 항일반만 유격투쟁의 중추였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인 최용건, 김일성, 안길과 중국인 지휘관 등은 중국 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1940년 12월 중순부터 국경을 넘어 소련 영내로 넘어갔다. 하지만 제3군장 허형식부대(정치부 주임 김책, 그 유명한 김책이다.)는 끝까지 북만주의 전구와 동북의 인민을 지키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그가 전사한 것도 그의 지휘 아래있는 장서린 소부대를 현지지도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일제는 공비 두목(독립군을 말함)을 생포, 포살하는 자에게 일 만원 포상금과 일 계급 특진을 걸었다. 당시 일 만원은 팔자를 고치는 돈이었다. 그래서 만주국 짭새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독립군 색출에 광분했다.(지금도 분쟁현장에서 승진에 눈이 멀어 불의한 권력에 수족 노릇하는 경찰들을 보라.)

1942년 8월 2일 오후, 헤이룽장성 경안경찰서는 한 주민으로부터 청봉령 소릉하 계곡 쪽에 거동수상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는다. 신고를 받은 국장유 경좌(일제의 지휘를 받는 만주경찰간부)는 출동을 앞둔 토벌대원들에게 일장 훈시를 한다. 그 훈시가 저열하기 그지없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다. 공비 한 놈만이라도 사로잡으면 1계급 특진에 현상금이 일 만원이다. 너희놈들은 평생 만지지 못할 큰돈이다. 너희들은 적어도 닷새간 로스케 백말도 탈 수도 있고, 엉덩이를 살살 흔드는 일본 계집 기모노도 벗길 수 있다. 왜년들은 서비스도 만점이다.” 이런 말에 홀려버린 토벌대들이 기어이 허형식이 경호원 두 명과 함께 하루 밤 잠 잔 숙영지를 급습한 것이다. 허형식은 급습을 당하지만 투항하지 않고 경호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홀로 토벌대의 표적이 되고 기관총과 수류탄 세례를 받고 산화한다. 1942년 8월 3일 오전 6시 43분이다. 산화한 후 일제가 목을 따 갔고 나머지 시신은 짐승의 먹이로 사라져서 겨우 뼈조각 하나 수습했다. 다행히 현장에서 수거한 허형식의 권총은 지금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에 전시해 있다.  

허형식의 전사로 동북항일연군과 중국공산당 북만성위는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허형식의 평생 동지 김책이 부대를 끝까지 영도한 끝에 1943년 10월에 잔류대원을 이끌고 소련으로 들어가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에 합류한다. 일본 패망 후 허형식의 동지였던 우천방은 경안경찰서 국장유 경좌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마침내 체포, 공개 처형함으로써 허형식 군장과 경호원 진운상의 원수를 갚는다.

내가 허형식의 죽음을 상세히 전하는 이유는 이 나라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풍찬노숙을 견디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바친 수많은 선열들이 우리 산하에 흩뿌려져 있음을 상기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독립군 선혈들의 피와 정신이 쌓여서 오늘에 이른 역사를 무시하고 갑자기 왜세가 대세이듯이 선전하는 권력에 대해 어이없어 비분강개하는 심정이다.

허형식의 고향은 구미 임은동이다. 그래서 임은 허씨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폐위 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1908년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당시 평리원 재판장, 현 대법원장)와 그 형제들은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킨 선각자들이다. 허위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후, 일제 순사들과 밀정들은 이 집안을 가만 두지 않았다. 일제의 집중감시와 탄압에 견디다 못해, 허위의 셋째 형 허겸은 가족단을 만들어 만주 망명을 결심한다. 비슷한 시기에 이회영가족,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가족도 서간도로 떠났다. 그래서 만주의 독립운동 텃밭이 된다. 독립운동 회고록인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남긴 허은여사도 한 집안이다. 이렇듯 항일명문가 집안이다. 허형식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아 예비 독립군으로 자라난 셈이다.

나는 여지껏 만주항일무장투쟁의 대표성이 김일성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허형식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 역사도 얼마나 선택적으로 알고 있는지 새삼 안타깝다. 누굴 탓하랴. 분단체제 안에서 각각의 권력이 입맛대로 역사를 가공해 온 것을. 그 안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 역시 체제의 울타리 안에서 보고 배우고 자랄 수밖에.

허형식의 가족은 어떻게 됐을까. 한국전쟁 발발 후, 허형식의 동생 허규식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28 수복 때 방화로 불에 타 죽은 걸로 알려지고 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허형식 부인 김점숙은 인민군에게 부역한 죄로 9.28 수복 때 우익청년단에게 붙들려 미아리로 끌려간 뒤 현장에서 처형되었다. 허형식의 어머니 성주댁 이성후는 졸지에 아들과 며느리가 좌익과 우익에게 번갈아 비명횡사당하자 그만 화병으로 앓아누운 채 세상을 떠났다. 이게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 바친 가족의 결말이다. 그러니 국가에서라도 최선을 다해 명예를 보존하고 기리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