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성
5시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JB Kim
4일  ·

《白凡逸志백범일지 1》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자손을 북돋우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백범의 출간사>

내가 이 글을 쓸 생각을 한 것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후, 나에게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을 시작할 때이다. 당시 본국에 들어가 있던 어린 두 아들인 인과 신에게 아비가 겪은 일들을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이렇게 유서를 대신하여 쓴 것이 이 책의 상권이다.

그리고 하권은 윤봉길 의사의 사건 이후 중일 전쟁의 결과로 인하여 우리 독립 운동의 기지와 기회를 잃고 목숨을 던지지 못해 살아남아 다음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으나, 그 때는 내 나이 벌써 칠십을 바라보게 되어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주로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를 염두에 두고 조국의 독립 운동에 대한 나의 이력과 포부를 밝히려고 쓴 것이다. 하권 역시 유서나 다름없다.

나는 내가 살아서 고국에 돌아와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나는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 뒤에 나의 일들이 지나간 이야기로 동포들의 눈에 비치기를 원할 뿐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아직 독립은 이루지 못하고 죽지 못한 생명만이 남아서 고국에 돌아와 사랑하는 동포들 앞에 이 책을 내놓게 되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끝에 붙인 <나의 소원> 한 편은 내가 우리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중요한 핵심을 적은 것이다. 무릇 한 나라가 온전히 서서 한 민족의 국민으로서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그 기초가 되

되는 철학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자기 나라의 뚜렷한 철학이 없으면 국민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휩쓸려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지탱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하게 되고 저희끼리 다투는 추태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처지로 보면, 더러는 로크(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 사상가)의 철학을 믿으니 이는 워싱턴을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요, 또 더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확립한 이론을 레닌이 제국주의 단계에 대응시켜서 발전시켰다고 하는 사상)를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일본 동경을 우리의 서울로 하자는 사람과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아서 세우고 주장해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 정신을 갖는 날이요, 참된 독립을 이룩하는 날이다.

<나의 소원>은 이러한 동기, 이러한 뜻에서 쓴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품은, 내가 믿는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을 적어 본 것이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은 이 한 편을 주의하여 읽고 저마다의 민족 철학을 찾아 세우는 데 참고를 하고 자극제로 삼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내가 이 책 상권을 쓸 때는 열 살 안팎이던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 인은 젊은 아내와 어린 딸 하나를 남기고 중경에서 죽었고, 작은아들 신이 스물여섯 살이 되어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아직 홀로 내 곁에서 나를 돕고 있다. 그는 중국 군인이자 미국의 비행 장교였다. 장차 우리나라의 군인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책에 나오는 동지들 중에 많은 이가 생존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적지 않다. 최광옥, 안창호, 양기탁, 현익철, 이동녕, 차이석 등은 세상을 이미 떠났다.

무릇 태어난 자는 모두 죽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개인이 태어나고 죽는 중에도 동포의 생명은 늘 있어왔고 늘 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자손을 북돋우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등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몸은 비록 늙었으나 절대 쓸모없이 썩히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남이 하거나 남이 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저마다 이 이치를 깨달아 행한다면 우리나라가 독립이 안 될 수가 없고, 또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로 보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 김구가 평생 동안 생각하고 행한 일이 이것이다.

나는 내가 못난 줄을 잘 안다. 그러나 아무리 못났더라도 국민의 하나, 동포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믿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쉬지 않고 해 온 것이다. 이것이 나의 생애요, 이 책은 그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을 발행하는 데 동의한 것은 내가 잘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동포의 한 사람으로 살아간 기록이다. 백범白凡이라는 내 호가 이것을 뜻한다.

내가 만일 조국의 독립 운동에 조금이라도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만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우리 젊은 남녀들 속에서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애국자와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일을 해내는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을 믿는다. 그와 함께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마다 이 대한민국을 자신의 나라로 알고 평생을 자기 나라를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뜻을 가진 내 동포에게 이 ‘범인의 자서전’을 내놓게 된 것이다.

1947년 음력 10월 3일

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