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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5일자 '오늘의 게시물'은 4개 입니다]

오늘도 페북은 끊임없이 이용자의 게시물에 다양한 형태의 여론조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소리가 담기지 않은 단순 '공유'에 의한 나의 공유게시물 일지라도
나의 게시물이 분명하며 엄연한 SNS 창작물로 존중받아야만 합니다.

특히 가장 악질적이고 무법적인 게시물의 무단 삭제는 잦아지는 반면에
이에 대한 대응방법은 전무한 상태가 속절없이 지속되는 상황이라
이런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방법으로 게시물의 존재근거를 최대한 다양하게 남기려고 합니다.

 

 [오늘의 게시물 4개]

오늘의 게시물 4번째/4개 게시물:

수아성
1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안국진
2일  ·

일제 때문에 비뚤어진 우리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저작에 열중인 경희대 강효백 교수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SNS를 통해 우리가 동해라고 부르던 바다의 원래 이름이 고래바다임을 밝혔다. 강교수의 증명을 살펴보면 그냥 쉽게 동해라 부를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고래바다라 부르고 한문으로는 ‘경해(鯨海)’라고 불러야 함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최치원이 쓴 향약잡영이다. 그 중 한 편인 금환(金丸)에서 고래바다라 부른 것이다. 이는 금색 공을 가지고 노는 곡예를 묘사한 시(詩)다.

몸을 돌리고 팔을 흔들며 금환을 놀리니,
달이 구르고 별이 흐르듯이 (구경거리가) 눈에 가득 차네.
의료(宜僚)가 있어도 이보다 더 좋으랴
고래바다 파도가 잔잔해짐을 알겠구나.

다음으로는 송나라 황제가 발해의 후예 정안국왕(定安國王) 오현명(烏玄明)을 위로하는 조서(977년)에 “경은 먼 나라의 호걸이자 장수이며 명왕의 후손으로서 마한의 땅을 다 차지하고 (우리 땅과) 경해(고래바다, 한국해, 이른바 ‘동해’)의 사이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래 바다와 송나라 사이의 땅에 마한이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아득하게 넓은 마한 땅이 곳곳마다 고래바다가 닿았다”(1397년, 태조 6년 3월 8일)는 기록과 “만일 다시 이 뒤로 고래바다[鯨海, 한국해]에서 표류하는 자가 있으면 보호하여 구제할 것이니”(1408년, 성종 11년 6월 7일)의 기록을 비롯하여 “김옥균(金玉均)의 무리를 생포해 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경해(동해) 바다 건너에 출몰하며 도리어 역적의 부류와 내통해서 은근히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일삼았습니다”(1887년, 고종 24년 4월 26일)까지 많은 곳에서 동해가 아니라 고래바다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울주의 반구대는 고래 사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이렇게 고래와 밀접한 민족은 없었다. 1849년 독도에 좌초했다는 프랑스 배 ‘리앙쿠르(Liancourt)’호는 고래바다로 고래 사냥을 온 배였다.

고래바다라는 기록은 선조들의 글에도 많이 나온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 1396)이 “범이 울어 바람 일으키고 고래가 바다 가로지른다”하던 땅이 우리나라 땅이며,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인 노계정(盧啓禎)의 묘갈명에 “고래바다를 편안하게 했다”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

광해군 때 시를 잘 지어 송도삼절로 불리던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해산정(海山亭)” 시에서 금강산 앞 바닷가에 서니 “동쪽으로 삼천리 고래 바다를 굽어보고, 서로는 금강산 일만 봉이 떠있다” 했으며 중국 친구가 왔을 때도 고래 바다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이행(李荇, 1478~1534)은 동래현을 설명하며, “교룡이 뿜는 안개가 땅을 휘감고, 고래 바다가 위에 뜬 하늘을 찬다”고 했으니 지금 동해라 부른 바다의 원 이름은 고래바다임을 알 수 있다.

김종직(金宗直. 1432~1492)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돌아오지 못한 박제상을 그리는 시에도 “치술령 꼭대기에서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고래바다 끝이 없어라” 한 이유도 이 바다가 고래바다였기 때문이고, 권필(權韠, 1569~1612)이 바다를 노래하며 “고래바다 아득하게 허공에 닿았다”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경상감사인 윤가회(尹可晦)에게 보낸 시에도 윤가회가 가면 “고래바다의 파도가 잔잔해져 배도 잘 다니리”라고 했다. 이때 윤가회는 경상도에 군영을 설치하는 책임자였다.

조선 전기에 일본을 다녀온 송희경(宋希璟, 1376~1446)이 후쿠오카의 하코자키에서 유숙을 할 때도 서쪽 큰 바다를 보며 “해와 달이 고래바다에 드리워 있구나”라고 했으니 일본과 한국 사이에 있는 바다의 이름은 분명 고래바다다. 우리바다의 이름을 바르게 부르자. 동해는 동쪽에 있는 바다란 말이지, 우리 바다의 고유명사가 아니다.

고래바다, 코리언 씨(Korean Sea), 라 메르 드라 꼬레(la mer de la Corée), 코레아니세스 미여(Koreanisches Meer), 마레 데 꼬레아(Mar de Corea)가 맞다. 키에프는 키이우라 금방 바꿔 부르면서 우리 바다 이름은 엉터리로 불러야 되겠는가?

1) 공을 잘 놀리는 사람. 『장자(莊子)』 시남(市南).
2) 『삼국사기』 제32권 잡지雜志 제1음악[樂] 향악잡영시 금환
3) 『송사(宋史)』 981년. 卿遠國豪帥, 名王茂緖, 奄有馬韓之地, 介于鯨海之表
4) 이색, 『목은시고』 제5권 虓虎風生鯨海橫
5) 채제공, 『번암집』 제 50권, 鯨海晏如
6) 차천로, 『오산집』 제2권, 東臨鯨海三千里, 西挹金剛一萬重
7) 이행. 『용재집』 제5권, 적거록 蜒煙籠地墊, 鯨海蹴天浮
8)김종직, 『점필재집』 시집 제 3권,鵄述嶺頭望日本, 粘天鯨海無涯岸
9) 권필, 『석주집』 제 7권, 鯨海茫茫逈接空
10) 이정구, 『월사집』 제16권. 鯨海波恬不碍舟
11) 송희경, 『일본행록』 3월, 日月垂鯨海
*월간바다낚시 & SEALURE 2023년 5월호.
아래 사진 출처는 강효백 교수 페북

 

 

 

 

오늘의 게시물 3번째/4개 게시물:

수아성
3시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송요훈
3일  ·

반일감정을 자극하지 말라고 합니다. 반일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건, 야당인 민주당이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고 여당인 국힘이고 '친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신문입니다.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고 수탈을 당하고 인권을 짓밟힌,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치욕의 과거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을 대하는 '감정'은 세대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식민지 교육을 받은 세대와 식민사관으로 교육을 받은 세대는 한국이 일본보다 뒤처져 있고, 그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다릅니다. 당당하고 자존심도 강하고, 식민사관이 아닌 이순신과 세종대왕으로 역사를 배웠습니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 독도 영유권 주장에 누구보다 더 분노합니다.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을 규제하는 무역 보복을 했을 때, 일본 제품을 사지도 말고 일본에 여행을 가지도 말자는 '노 재팬' 운동을 일으킨 건 젊은 세대였습니다. 한국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본이 젊은 세대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반일감정을 자극한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우익정권입니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 역사의 시계를 군국주의 시대로 돌리려는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배후이고 그런 일본에 비위를 맞춰주고 퍼주고 뒷통수나 맞는 윤석열 정권의 굴욕적 외교가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미국을 대하는 '감정'도 그렇습니다. 부모형제를 잃고 재산을 잃은 전쟁을 겪은 세대와 보릿고개의 가난을 겪은 세대는 미국에 '빚진 마음'이 있습니다. 노인 세대에겐 '동맹'이 생명을 지켜주는 최우선의 가치일 겁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빚진 마음이 없습니다. 불공정한 한미관계에 거부감이 큽니다. 미국과의 관계 역시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관계이고, 한국은 미국에 당당한 나라이기를 원합니다.

광우병 사태의 근본 원인은 미국을 대하는 대통령 이명박의 저자세와 검역 주권을 포기한 굴욕적 협상이었습니다. 그것이 국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동맹이라면서 손목 비틀리고 주머니 털리는 '불공정'에 특히 분노한 건 젊은 세대였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그렇습니다. 미군의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깔려 죽었는데도 주둔군의 지위를 내세우는 미국의 고자세에 분노하여 광장으로 뛰쳐나와 촛불을 든 건 주로 젊은 세대였습니다.

반미감정은 누가 조장하는 게 아닙니다. 말로는 동맹이라 하지만 한국을 무시하는 미국과 미국 앞에만 서면 자동으로 위축되어 No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못하는 한국 보수정권의 저자세가 반미감정을 조장하는 겁니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금고털이가 잡혔는데 너네 집문서도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금고털이는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금고 속을 살펴 다른 도난품은 없는지 확인하는 게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런데 집문서를 도난당한 적이 없다고 하고, 그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하고, 우리 사이를 의심하지 말라고 하고, 아무 말도 말고 입을 다물라고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지금의 형국이 그렇습니다.

누가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있습니까? 도청을 한 미국이 동맹을 훼손하고 있고, 그럼에도 항의조차 못하는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가 우리의 자존심을 훼손하고 한미동맹을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홍준표대구시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력 없는 초보 대통령이 결과적으로 반미감정을 조장하고 있는 겁니다. 정치력만 없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오늘의 게시물 2번째/4개 게시물:

수아성
3시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임재원
15시간  ·

천박하고 천박하다.

권력은 사유화되었고 권력에 기생하는 기생충들이 풍기는 악취때문에 보통의 국민들은 숨쉬기 조차 힘들다.

어떻게 이룬 나란데 저 천박한 것들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긴단 말인가?

삼례 들판의 횃불처럼 우금치 고개에서 하얗게 스러져 간 선혈처럼
죽창과 횃불을 높이 들고 천박한 무리들을 태워버려야 겨레가 살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 갈 수가 있다.

겨레여!

다시 독립운동을 해야할 때다. 

 

 

 

 

오늘의 게시물 1번째/4개 게시물:

수아성
8시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김정락
22시간  ·

<오염된 역사기억>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편함을 느낀다. 최고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과잉된 자부심은 독일 나치나 일본의 극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민족을 부정하는 역사이나 행태도 참을 수 없다. 그것도 우리를 지배했던 일본의 시각으로 부정하는 태도에는 분노가 치민다. 군대에서 흔히 들었던 자기비하적인 말은 “엽전(조선 놈)은 맞아야 해”였다. 이 노예로서의 자격지심은 역사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니 때리는 존재, 즉 (외부의) 지배자를 쉽게 긍정하고 순종하는 철저한 굴종의식이 지금까지 그것도 사회의 지도층이라 불리는 계급들의 가치관으로 굳건한 것 같다.

불편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의식에서 독립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가 구한말, 일제의 지배를 통해 공고해졌고, 그 기득권을 지켰던 친일파들은 2, 3세대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인지 과거 반일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던 권력이 이제는 대놓고 친일을 숭상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소위 ‘문부성 장학생’들과 ‘풀브라이트 장학생’들이 권력의 중추들이 되었다.  

친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예술분야에서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식민지배하의 친일은 불가피했다고 넘어가겠다. 더 큰 문제는 해방 이후의 친일예술가들의 행적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참담한 인물이 조각가 김경승이다. 일제하에서 그의 친일행적은 화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해방이 된 나라에서도 그의 활약은 눈부시다. 그는 여전히 미술계의 권력이었고, 거의 모든 관제사업을 도맡았다. 국가기념비사업은 그의 거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승만, 벤플리트, 맥아더 동상 따위는 그래도 수긍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손에 의해 이순신, 안중근, 김구의 동상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4.19학생기념탑과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정읍 황토현전적지에 세워진 전봉준 동상과 부조벽도 그의 작품이다. 친일부역자에게 민족기념조형물을 맡긴 것도 황당하지만, 그의 작품들에게서 읽혀지는 안일함과 역사성의 부재는 참담할 지경이다.

전봉준 동상은 위인의 자세와 위상을 고려했다지만, 맨상투의 모습이다. 맨상투는 조선시대에 죄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든다. 조각가의 눈에는 전봉준은 여전히 농민반란을 이끈 역도였을 뿐이다. 동상의 배경을 이루는 부조벽에 돋을새김으로 재현한 동학군들의 모습은 더욱 가관이다. 의복을 제대로 갖춘 오동통한 몸집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마치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이 행렬에서 일말의 죽음을 각오한 결기나 저항의지를 찾기 어려운 것은 나만의 소회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미술사학자인 유홍준이 토로했던 것이다. 아래의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기념조형물들이 군사독재 하에 계획되고 실행되었다는 것이고, 군사독재정권은 동학농민군의 개혁정신을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고자 했다. 이는 공주 우금치에 있는 동학혁명군위령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령탑 비문엔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중략)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고 새겨져 있다. (한국농정신문, 2018년 05월 04일)

김경승, 전봉준동상과 배경부조시설물, 1987, 정읍; 케테 콜비츠, 직조공의 봉기, 판화, 1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