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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아성
2018년 8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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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018년 8월 19일  ·

선비와 의병

19세기 후반이 되자 서구열강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 함대의 침략)와 신미양요(1871년 미국 함대의 침략)가 이러한 추세를 입증한다. 서세동점의 추세를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이제 조선 사회는 마치 거대한 파도에 떠밀려 난파하는 한 척의 조각배와도 같았다. 서구열강은 근대식 살상무기를 동원하여, 조선을 압박했다. 조선은 개항을 강요당했고,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권을 빼앗아갔다. 그 와중에 메이지 유신(1868)으로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도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려 들었다.

조선의 선비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구국의 의병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마을이 선비들의 부름에 따랐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된 농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의 길에 함께 나섰다.

기존의 사회질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동학의 기치 아래 뭉쳤다. 그런데 동학운동의 저변에도 성리학의 근본정신이 맥맥이 흐르고 있었다. 동학의 종지(宗旨)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은 천인합일설을 변형한 것이었다. 동학의 교조 최제우(崔濟愚)는 성리학자 최옥의 자제로, 어린 시절에 성리학적 교양을 착실히 쌓은 선비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과 김개남 등도 모두 이름난 선비의 후예로, 평시에는 마을에서 훈장 노릇을 했다. 훗날 동학을 계승한 증산교 측에서는 최제우의 가르침이 지나치게 성리학(유교)에 기울었다고 비판할 정도로 성리학과 동학 사이에는 사상적 유대가 깊었다.  

선비가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倡義)하자, 마을 사람들이 뒤따라 일어났다. 조선 사회의 특징이 여기에 있었다. 선비와 농민이 가치관을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비가 농민들의 신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국운이 위태로웠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심에 여러 선비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최익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임병찬 등과 함께 호남의 순창 지방에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평일에는 단 한 번도 무기를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그들이 무장투쟁을 일으켰다. 그들의 싸움은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도덕심의 투쟁이었다. 그들은 살고자 일어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신념을 지키고자 했다. 다름 아닌 자기희생의 길이 의병운동이었다.

1906년(광무 10) 윤 4월 11일,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역적을 토죄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상소문에서 그는 의병투쟁의 막다른 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참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나라 안팎의 도적들이 합세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강제로 조약을 맺어 침탈을 강행하였습니다. 이제 나라가 존재한다는 말은 허울에 지나지 않고, 폐하가 계시는 자리도 허위(虛位)에 불과합니다. 종묘와 사직은 보전할 길이 없고, 민생은 어육(魚肉)이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릴 뿐입니다. (……) 그런데도 역적들은 적(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우롱을 감수하며 이렇게 둘러댑니다. ‘일본에 외교권을 잠시 빌려주었다가 우리가 부강하게 되면 다시 찾을 것이다.’ 아, 저 왜놈들이야 어차피 마음과 행실이 짐승 같은 오랑캐이니 인간의 도덕으로 꾸짖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적들은, 국가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기어이 나라를 망치고자 이처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을 저지른다는 것입니까?”

1905년에 조선왕조는 일본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을사늑약을 맺었다.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하루아침에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나라의 대신으로서 길이 씻을 수 없는 매국의 죄를 지었다. 최익현은 그러한 역적들을 통렬히 규탄했다. 그는 국가의 운명을 염려하는 한 선비의 입장과 각오를 단호한 어조로 밝혔다.

“만약 하늘이 내린 재앙을 (우리가) 뉘우치지 않아,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저들에게 짓밟히게 된다면, 신은 죽음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장차 저는) 사나운 귀신이 되어 원수 놈의 오랑캐를 쓸어 없앨 것입니다. 맹세코, 저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을 결심입니다.”

의병을 일으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최익현은 맹세했다. 죽어서라도 사나운 귀신이 되어 일본에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최익현의 나이 74세였다. 바로 그해에 최익현은 거사에 실패하여 대마도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행동으로 실천했다.

객관적인 정세로 보면, 의병투쟁에는 승산이 거의 없었다. 이를 모를 리 없었으나, 최익현은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부언(附言)하였다.

“(역적들이 스스로) 저들의 노예가 됨을 즐거워하며, (도리어) 대의를 세운 우리들을 원수처럼 여겨 (제 놈들끼리 앞을) 다투어 (우리들) 의병을 비도(匪徒: 도적 떼)라 부르며 헐뜯는다 해도, 신은 그런 일을 (털끝만큼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짐작대로 매국노들은 의병을 ‘비도’라고 헐뜯었다. 연로한 큰선비 최익현은 억울하게 도적 떼의 누명을 쓰게 된다 해도, 목숨을 바쳐 구국의 대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통한 그 심정을 고종에게 미리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런 슬픔이 어찌 최익현 한 사람만의 것이었겠는가. 황량한 들판에서, 깊은 산골짜기에서 이름 없이 쓰러져간 모든 의병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관말직의 영예조차 누리지 못한 평범한 농부들이었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버리고 스스로 죽음의 대열에 합류한 무명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었을까. 수만 수십만을 헤아리는 평범한 농부들이 그때 그렇게 비장한 선택을 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구차하게 살기보다 차라리 떳떳하게 죽기를 바랐다. 우리 역사에는 이런 엄숙한 순간이 존재했다. 죽음의 깊은 의미를 모르고서는 차마 단행할 수 없는 운명의 선택이었다. 이것이 성리학의 역사적 결실이요, 선비의 문화적 역량을 증명하는 좌표이기도 했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유독 나의 눈길을 끄는 이가 또 있었다. 고광순(高光洵)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고경명의 12세손이었다. 명망 높은 선비가문의 후예로서, 고광순은 을미사변(1895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냈고,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모집했다. 그는 좌도의병대장에 추대되었고, 나주와 광주를 무대로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 뒤 1906년 4월,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순창에 도착하기도 전에, 최익현은 패전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이듬해(1907) 1월 24일, 고광순은 고향 마을에서 고제량, 고광훈, 고광채 등 여러 일가와 윤영기, 박기덕 등과 뜻을 모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2월에는 남원의 양한규와 힘을 합쳐 전라도 남원성을 공격했다. 또 5월에는 전라도 능주를 공격했고, 8월에는 동복으로 쳐들어갔다. 곧이어 지리산 문수암을 거점으로 활약하던 의병장 김동신과 연합작전을 계획했다.

그해 8월에는 구례 연곡사 방면으로 진출하여, 화개동과 문수암 일대에 의병을 주둔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군량미도 확보하여 “불원복(不遠復: 곧 나라를 회복한다)”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하지만 그해 9월, 일제가 연곡사를 습격했다. 그는 부장 고제량 등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고광순도 그러했고, 구한말 의병들은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의병 투쟁을 계속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최후의 순간까지 치열하게 항쟁을 계속했다.

구한말 의병운동은 어느 한 지방에 국한되지 않았다. 침략자 일본은 선비들이 이끄는 의병운동에 경악했다. 마침내 그들은 극약처방을 강구했다. 1910년 강제합병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단행했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에 걸쳐 일제는 의병활동이 유난히 활발했던 남부지방에 최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조선 의병들에 대해 무차별적이고 대대적인 살상을 감행했다. 그때 남부지방의 의병은 지리산과 전라도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일본군 보병 2개 대대와 해군함정이 투입되었다. 그들의 조직적이고 근대적인 군사작전에 맞서기에는 무기와 전력 면에서 역부족이었다. 일본군은 사방에서 의병을 포위하고, 근거지로 삼을 만한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다. 이때 무고한 인명이 곳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토벌작전을 구실로 조선 사회 전반을 강하게 압박했다. 시국은 살얼음판이 되었고, 전국이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잔학무도한 토벌작전에서 용케 살아남은 의병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떠나 그곳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1910년 강제합병이 현실화되자, 북부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들도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오직 붓과 책만 숭상하던 선비였다. 또 그들의 교화로 순후한 인심을 자랑하던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외적이 침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분연히 일어섰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의 비상한 의기와 애국심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만약에 그들이 성리학의 가르침을 몰랐어도 이런 운동이 가능했을까. 서당이 없었어도, 문자를 몰랐어도 이처럼 의로운 행동이 일어났을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출처: 백승종, <<신사와 선비>>(사우, 2018)

8월에는 이 나라의 비운에 관해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나라가 망했던 것도, 그것을 반쯤이나마 다시 건진 것도 이 달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