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성
9분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남은 미와 함께 지는 해의 집단서방편,
북은 러와 함께 글로벌 다수와 함께하는 행보!

강내희
3시간  ·

<러시아는 ‘서구병’을 극복하는 모양새인데 한국은?>

러시아, 러시아, 러시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입시 공부는 안 하고(그 바람에 재수했다) 러시아 소설에 탐닉한 적이 있다. 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방 도시에서 유학하던 시골 촌놈의 수중에 러시아 소설 전집이 들어온 덕분에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뒤로 한동안 나는 러시아 소설 하면 겨울이 생각났고 특히 난로 위에 놓인 사모바르 주전자에서 나오는 김이 안개가 되어 방안을 자욱하게 만든 모습을 그려보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당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을 때 이상하다 싶은 것 하나가 있더라. 등장인물 누군가가 대화 중에 갑자기 프랑스어로 말한다는 것. 그 이유를 당최 알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끼리 있는데 이 사람은 왜 프랑스어를 쓰지? 물론 당시는 ‘미학적 거리’나 다른 문학적 표현 기법에 대한 이해가 적어 그것이 도스토옙스키 등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이 자주 사용한 인물 묘사(characterization)의 한 방식임을 알지 못하던 때다. 나중에 와서야 러시아 소설에서 특정한 등장인물들이 프랑스어를 쓰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그들의 ‘서구병’ 즉 서구에 집착하는 고질병을 돋보이게 하려는 표현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경우 그의 소설에서 주로 상층부 인물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러시아 현실과 그만큼 동떨어진 세계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서구병은 18세기 초에 피터대제가 근대화를 위해 서구화를 시도한 데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피터는 서구화를 위해 러의 상층부 인구가 프랑스어를 배우고 일상생활에서도 사용하도록 권장했다고 한다. 19세기에 쓰인 러시아 소설에서 일부 상층부 등장인물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재현되는 것은 그런 점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등이 그런 행태를 지닌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19세기가 되면 러시아 국내에서 외국어 사용 관행은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서구병이 깡그리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러시아의 서구 지향은 면면히 이어져 온 셈이다.

최근에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고해성사를 했다. 자신이 서방 지도자들을 너무 믿은 바람에 나라에 큰 피해를 자초하게 되었다고 자책한 것이다. 그의 말인즉슨 러와 우크가 전쟁을 치르게 되어 양국에 전화로 인한 큰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생긴 데는 자신의 실책이 작용했다는 것. 서방이 그들을 철석 같이 믿은 푸틴을 처음부터 속이려 들었다는 것은 독일의 전 총리 앙겔라 메르켈과 프랑스의 전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우크라이나의 전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가 이미 실토한 바다. 푸틴은 자신이 국가 지도자로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서방 지도자들에 기만당해버린 것에 대해 상당한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나는 이런 내용을 매일 청취하는 영국의 국제정세 분석가 알렉산더 메르쿠리스의 유튜브 채널에서 들었다.

 러시아 상층부 인사들의 서구병은 푸틴이 앓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푸틴의 전임인 옐친은 소련 해체 이후 만들어진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망친 인물이다. 알코올 중독자로도 알려진 그는 서구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알아 하버드 대학 경제팀이 권장한 공공영역의 사유화를 너무 열심히 추진한 나머지 소련 시절에는 전혀 없던 올리가르히를 출현시켜 올리가르흐가 러 경제를 말아 먹게 했다. 1990년대에 러는 평균수명이 크게 떨어지고 사회 조건의 악화로 사망한 인구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잃은 2,700만 명보다 더 많다는 말이 있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어떤가. 그는 집권 말기에 나토에 맞서 결성된 바르샤바조약기구를 일방적으로 해체해버리는 ‘강수’를 뒀다. 서구병에 단단히 걸려 최대의 선물을 서구에 갖다 바친 셈이다. 러시아의 태도 변화를 보고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이 소련과 서방의 각기 다른 영향권 아래 있던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허락할 것을 요청하자, 고르바초프는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등이 나토는 동쪽으로는 1인치도 가지 않겠노라고 하는 거짓말을 꿀떡 같이 믿고 그 요청을 수용해준다. 그 또한 러시아와 서방의 평화 관계라는 신기루를 믿었던 셈이다. 그 결과 서방은 독일의 통일만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나토의 끝없는 동진 성과까지 얻어냈다.

지금 진행중인 러-우 전쟁은 나토가 그동안 추진해온 동진의 최종판이라 할 수 있다. 러는 소련 해체 이후 나토가 계속 동쪽으로 오는 것에 대해 ‘레드 라인’ 침범이라며 항의해왔으나 나토는 러시아의 그런 항의를 종이호랑이의 것으로 치부하고 드디어 러와 접경을 이루는 우크까지 나토의 회원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러로서는 이것까지는 참아낼 수 없었던 것 같다. 러가 22년 2월에 드디어 칼을 뽑은 데는   2014년의 마이단 쿠데타 이후 우크 정권이 8년에 걸쳐 러계 주민이 다수인 돈바스 지역을 폭격해 1만4천여명이나 죽인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진단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고 여겨진다. 러로서는 우크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 우크에 배치될 것이 뻔한 나토의 핵무기가 모스크바를 겨냥하게 되는 존망적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러는 이번 우크라이나전쟁을 거치며 그동안 고치지 못하던 서구병을 드디어 치유하는 모양새다. 푸틴이 자신의 실책을 자책하는 고해성사를 한 것 자체가 그런 한 징후로 보인다. 최근에 러 고위 인사들의 공식 발언을 들어보면 러가 이제 서구와는 확실하게 선을 긋는 행보를 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 러는 지금 서방 제국주의의 중심인 G7에 맞선 브릭스에서 중국과 함께 양대 중추를 이루고 있다. 올해는 브릭스의 회장국으로 조직을 주관하며 회원국 증대에 총력을 기울이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할 예정이다. 이런 활동은 서구로부터 이런 거리 두기가 중심일 터라 러의 서구병 치유에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게다가 서방은 지금 러의 새로운 태도를 부추기기까지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서방 은행에 예치되었다가 러-우 전쟁 이후 대러 제재로 동결돼있는 러 중앙은행 금융자산을 미국이 앞장서서 탈취해 우크에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타국의 자산을 동결한 일도 이미 문제인데 탈취까지 한다는 것은 국제법에도 어긋나려니와 러에 대한 전쟁 선포와 같다는 의견이 유력하다(최근 미국 코넬대학 모 교수가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글의 내용이란다). 그뿐만 아니라 러 자산을 탈취하면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서방 금융기관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의견도 블룸버그 등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미국의 바이든 정권은 러의 금융자산 탈취를 강력하게 추진한다는데, 미국과 서방의 이런 태도가 러로 하여 반드시 서구병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게 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서구병을 고치고 난 러의 모습은 어떠할까? 최근에 러가 보여주고 있는 행보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러는 지금 서구보다는 동방, 나아가서 비서구 전역 즉 글로벌 다수에서 연대와 동맹과 협력의 대상을 찾는 모습이 확연하다. 이것은 러가 원해서라기보다는 서방이 러가 그리하도록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는? 서방은 쪼그라들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 이 쪼그라드는 서방에 빌붙는다는 점이다. 한국은 노태우 정권 이래 러와 제법 괜찮은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러-우 전쟁 기간 서방의 주구가 된 바람에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최근에 북조선은 러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해서 최신 ICBM 기술까지 전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조선은 러와 함께 글로벌 다수와 행보를 함께하는데, 남한은 집단서방의 일원이 됨으로써 지는 해의 편임을 자처하고 있댜. 이런 행보는 미국이 주도하는 집단서방의 일원이 되려 하는 한국 지배 블록이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그들은 과거 러시아의 지배계급이 앓고 있던 것과 비슷한 서구병의 중환자와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그 병의 치유 원천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인민, 민중의 힘뿐일 것 같다. 우리를 구할 힘의 원천이 우리 자신 말고 어디에 있겠는가.